광복절 - 73주년, 일제강점기와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오늘날

2018. 8. 15. 13:29잡학다식

광복절 - 73주년, 일제강점기와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오늘날


광복절 - 73주년, 일제강점기와 민족대표 33인 그리고 오늘날


광복 73주년을 맞은 오늘, 잇따라 광복에 관련한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우리에게 광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광복절이 어떤 날인지, 이날이 있기를 위해 싸운 분들에 대해 포스팅 해보려 한다.



우리나라는 뼈아픈 역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우리 역사상 민족의 정통성이 단절된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의 시작은 18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라는 시기에 정치, 경제, 사회, 군 등의 개혁을 겪으며 근대화를 이루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침략"이라는 발을 내딛게 되었고

* 강화도조약(1876) : 강화도에서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조약으로 항구개방, 치외법권, 일본화폐통용 등이 있다.


"수호국"이라는 명분하에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을 겪으며 조선의 수뇌부에 계속해서 침투하였다.

* 임오군란(1882) : 신식군대와의 차별대우에 불만을 구식군대가 폭동을 일으킨 사건

* 갑신정변(1884) : 임오군란을 계기로 개화세력이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동학농민운동을 발판삼아 조선의 종주국이던 청나라와의 전투(*청일전쟁)를 치뤄 승리한 일본은

* 동학농민운동(1894) : 탐관오리의 수탈로 민중이 들고 일어난 민중 봉기

* 청일전쟁 : 동학농민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이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 또한 톈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파병하였고 이로 인해 전쟁 발발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 정치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고 *러일전쟁에 승리하면서 실질적인 조선의 지배를 시작했다.

* 갑오개혁(1894) : 94~96년까지 약 19개월 간의 3가지 개혁 근대 제도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으나,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조선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 러일전쟁(1904) : 만주 및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벌인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


이후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을 필두로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하고 8월 29일 공표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지배를 당한다.

* 이완용 : 나라를 팔아먹은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어마무시한 매국노, 고종을 협박해 을사조약(갑오개혁)을 체결하고 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했다.



독립운동의 시작 3.1운동의 주역인 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수립된 계기가 된 3.1운동을 시작한다.

아래는 민족 대표 33인의 명단이며, 마지막 3인은 이후 변절하였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손병희 

 천도교 측 수장. 1921년 사망. 딸 다섯 중 셋째 딸 손용화는 소파 방정환의 아내.

이승훈 

 개신교 측 수장이자 교육자. 1906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음. 1930년 작고. 33인 중 가장 늦게 풀려남.

한용운 

 불교 대표. 공약 삼장 작성. 말년에는 가난과 중풍에 시달리며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로 연명하다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사망.

권동진 

 1882년 일본 망명 후 1905년경(?)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신간회 부회장으로 광주학생운동 참여. 증손 권혁방 씨는 33인 유족회 회장 재임.

권병덕 

 1894년 손병희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감사원장, 선도사 등을 역임. 1947년 타계.

길선주 

 한국 최초의 목사. 3.1 운동 때 서울에 늦게 도착. 총감부에 자수하였으나 무죄로 풀려남. 독립유공자에서 제외됐었으나 2009년 건국훈장 수여.

김병조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았음. 상해에서 임시정부 상임이사, 사료편찬위원 등을 역임. 독립혈사 간행. 북에 머물렀다는 이유로 유공자 포상이 안 되다가 1990년 3.1절이 되어서야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김완규 

 경술국치 후 천도교 입문. 3.1 운동 후 도사직을 맡고, 민중 계몽운동 전개. 1949년 타계.

김창준 

 개신교 측 대표. 함경북도 만세 운동 주도. 해방 후 사회주의 개신교 운동 전개.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경 월북. 독립유공자에서 제외.

나용환 

 23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포교 사업. 1936년 병사.

나인협 

 19세 때 동학 입문. 3.1 운동 후 천도교 교사 활동. 1951년 병사.

박동완 

 개신교 측으로 3.1 운동 경기 지방의 시위 주도. 신간회 상임이사. 1923년 하와이로 망명. 1941년 병사.

백용성 

 불교 대표. 법명은 용성진종대사. 16세 때 출가하여 해인사 스님들의 봉기 주도. 불교 정화 및 대중화에 힘써 서울 시내에 최초로 포교당 세움. 대각사 창건 후 60여종의 불경어록과 저술을 남겼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틈틈이 상해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지원했으며, 윤봉길을 불자에 귀의시킨 뒤 그를 임시정부로 보내 김구 밑에서 일하게 하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후에는 직접 중국으로 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에게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하는 등 무장투쟁을 준비하였으나 밀정에게 걸려 실패했으며, 실의 속에 1940년 입적.

박준승 

 29세 때 천도교 입문. 3.1 운동 때 임실군, 남원시, 장성군 등 호남 지방 민중 봉기 주도. 1921년 옥사.

신석구 

 개신교 대표. 3.1 운동 후 1938년 신사 참배 거부. 1945년 전승 기원 예배 거부로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9년 감리회 북한 지역 총책임자로 개신교 민주당 결성. 같은 해 진남포 4.19 사건으로 북한 당국에 검거되어 1950년에 처형.

신홍식 

 개신교 대표.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가. 신사 참배 거부. 1937년 사망.

양전백 

 평양 신학교 졸업. 목사로 있다 3.1 운동 참여. 목회 사업에 전념. 105인 사건에 연루.

양한묵 

 1898년 일본에서 손병희를 만나 동학에 입문. 1905년 헌정동지회를 만들고 구국운동. 1919년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순국.

오세창 

 개화론자 오경석의 아들이자 천도교 신자. 한성순보 기자. 만세보, 대한민보 등의 사장. 해방후 매일신보, 서울신문 사장. 1953년 사망.

오화영 

 감리회 목사. 6.25 전쟁 때 서울에서 납북되어 1962년 병사. 북한의 평양 애국 열사릉에 안치. 1989년 3.1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1996년 11월 위패만 국립묘지에 안치.

유여대 

 모사로 3.1 운동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다 오후 늦게 서울 도착. 일경에 붙들렸다. 1937년 사망.

이갑성 

 개신교 신자.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 3.1 운동,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운동, 흥업구락부 사건 주도 등에 일제와 타협하지 않은 인물 중 한 사람이었지만, 1980년대에 변절했다는 주장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05년 삼일절 특집 SBS 뉴스추적에서 심층 취재한 결과 오히려 요시찰인 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매일신문에서 2010년에 이 떡밥에 낚여 친일파 언급했다가 정정 기사를 냈다.# 매일신문은 역사 속의 인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고도 친일파로 매도된 억울한 '희생자'였다고 평했다.#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였다.

이명룡 

 개신교 대표. 105인 사건 연루. 3.1 운동 후 미국으로 망명. 1956년 병사.

이종일 

 천도교 대표.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선언서 인쇄. 1925년 작고.

이종훈 

 천도교 대표. 1931년 만주에서 병사.

이필주 

 YMCA 초대 체육 교사로 일하다 목사가 되었음. 1942년 작고.

임예환 

 동학혁명에 동참, 3.1 운동에 가담.

최성모 

 감리회 목사. 이필주를 만나 3.1 운동에 가담. 황해도 시위 주도.

홍기조 

 22세 때 천도교 입문, 손병희와 평안도 천도교 독립운동 주도. 3.1 운동 후 평안도 용강에서 독립운동. 1938년 병사.

홍병기 

 천도교 대표. 고려혁명위원회 조직.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1949년 작고.

박희도

33인 중 최연소. 3.1 운동 후 잡지 『생활사』 창간. 이후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당시 신문 가십란의 단골 스타가 되었으며[1] 결국 친일 성향의 월간 잡지 『동(양지)광』의 창립인,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로 완전히 변절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다가 51년 사망.

최린

천도교. 선언문 초안 작성. 1934년 중추원 참의, 37년 총독부 조선어판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 39년 임전 보국단장을 역임하는 등 친일에 앞장섰다. 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때 다른 이들과 달리 그나마 눈물로 참회하는 진술을 하였다. 이때 옆에서 계속 변명해대는 이광수에게 닥치라고 했다. 6.25 때 납북되었다.

정춘수

3.1 운동 당시 감리회 목사로 함경남도 원산에서 만세 운동을 지도했다. 1934년 흥업 구락부 사건으로 고문당했다. 신사 참배 및 창씨개명 행위로 변절자로 간주되나 위의 사람들에 비해 적극적인 친일 행적은 없다. 아마 자발적으로 한 이들과 다르게 못 버텨서 굴복한 듯. 독립 유공자에서 제외, 51년 사망. 청주시의 우암산에 조성된 삼일 공원에도 이 사람을 포함한 충청북도 출신의 민족 대표 6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으나 1996년에 시민들이 철거해서 지금은 5개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역사 교육을 받았다면 일제강점기에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알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알 것이다.


광복절은, 일제강점기가 끝나는 우리나라가 다시 주권을 찾은 기념적인 날이다.

광복절 1945년 8월 15일(음력 7월 8일) 수요일

,  일본에게서 독립하여 국권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날.


일제는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지만, 1945년 8월 6일 미국의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8월 15일 항복하였다.

출처 : 나무위키


이후 1948년 8월 15일, 한국은 정부수립을 선포하고 8월 15일은 광복과 정부수립의 두 가지 의미를 지난 날이되었다.


오늘날, 아직도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같은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는다.

한국전쟁을 통해 무기를 수출해 2차 세계대전으로 파탄난 경제를 복구한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세계를 이끄는 경제 대국으로써 왜 그런 위상을 지니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늘은 광복 73주년과 함께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출처 : 나무위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가 어떤 경위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어떻게 광복을 이루어 내었고,

어떤 숭고한 희생이 있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날이다.